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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책 속 밑줄긋기

인문 추천도서]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핵심 한 문장,

상대를 잘못 만나 인생을 망쳤다면, 그런 상대를 선택한 ‘나’라는 존재는 대체 뭔가?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의 저자 고미숙은,

고전평론가. 지식인공동체 ‘수유+너머’에서 활동하다가 현재는 감이당에서 활동하고 있다. 감이당은 인문, 역학 등 지혜로운 삶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배울 수 있는 공간이다.





책 속 밑줄긋기


p13.  사람들은 사랑을 언제나 대상의 문제로 환원한다. 한마디로 대상만 잘 고르면 만사형통이라 여기는 것이다. 

사랑에 실패한 건 대상을 잘못 골랐기 때문이고, 아직까지 사랑을 제대로 못해 본 건 ‘이상형’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참으로 신기한 인과론이다.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는 판에 나는 몸만 쏙! 들어가면 되는가? 실패한 다음엔 다시 몸만 쏙! 빠져나와 복수극을 펼치면 되고? 이렇게 지독한 이기주의가 또 있을까? 

상대를 잘못 만나 인생을 망쳤다면, 그런 상대를 선택한 ‘나’라는 존재는 대체 뭔가?

 

p16. ‘불멸의 사랑’은 망상 중의 망상이다. 그건 마치 어린아이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어른이 된 다음에도 계속 끼고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다.

(중략) 

결별한 진짜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굳이 원인을 찾는다면, 시절인연이 어긋난 탓이라고 밖에는.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듯이 말이다. 

사랑도, 삶도 마찬가지다. 

시절인연이 바뀌면 서로 헤어져야 한다. 

심하게 말하면 어떤 사건들 때문에 헤어진다기보다 헤어질 때가 되어서 그런 사건들이 일어난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다.

  

p42. 순정파는 사랑에 올인하는 만큼 일방통행이다. 즉, 대상과의 교감을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죽음을 불사한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구축한 망상일 뿐이다.

자신과 같은 의미의 사랑을 원하는지 아닌지 따위는 당최 고려하질 않는다. 그냥 무데뽀로, 자신이 설정한 콘셉트대로 밀고 나간다. 그러니 당연히 배신을 당할밖에. 그리고 나면 ‘죽네 사네’ 하며 생난리를 친다.

그런가 하면, 냉소의 벡터는 그 반대다. 자기 안에 웅크리고 있으면서 절대 일정한 선 이상을 허용하지 않는다. 선을 넘는 순간, 바로 밀쳐 낸다. 그 경계선을 어떻게 아냐고? 그러니 그거 계산하느라 머리가 깨진다. 겉으로야 지적이고 냉철한 듯 보이지만, 그런 건 지성이 아니라, 잔머리다. 그리고 그렇게 머리를 굴려 대는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자의식을 침범당하는 게 두려워서다. 자신을 온전히 내보이는 게 겁이 나서다. 그렇다고 내면에 대단한 무엇이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래서 더 완강하다. 그 두려움의 표현형식이 바로 냉소다.

 

p64. 사랑은 갈등이 없는 것이라는 착각도 희생이라는 미덕과 연계되어 있다. 예컨대, 뭔가를 꾹꾹 참거나 덮어주는 것이 사랑의 기술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하지만, 참는 건 참는 것일 뿐이다. 참고 견딘다는 건 속에 꾹꾹 눌러 담는 것이지 상대와 진심으로 소통하는 행위완 거리가 멀다. 고로 반드시 언젠가 폭발해 버린다. 그리고 그땐 이미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고 만다. 남은 것은 환멸과 상처뿐!

 

p97. 욕망이란 고유한 실체가 아니라, 관계와 배치의 산물이다. 즉, 시대에 따라 욕망을 특정한 방향으로 조직하고 유도하는 ‘사회적 배치’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사랑을 열망하는 우리시대 청춘들을 끊임없이 좌절시키는 대지, 아니 ‘덫’이다.

(중략) 우리의 욕망은, 우리의 망상은 어떤 시대적. 사회적 조건에 붙들려 있는가?

 

p113. 동양적 우주론에 따르면 상생을 위해선 반드시 상극이 필요하다. 상생의 흐름 속에서는 어떤 ‘유형적인’ 성취도 이뤄지지 않는다. 단적으로 말하면, ‘나’를 완성시키기 위해선 반드시 상극의 기운이 있어야 한다. 나무가 자라기 위해선 흙을 뚫고 나와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흙이 단단하고 풍부해야 나무가 강하게 치고 나올 수 있다. 흙이 흐물흐물하면 나무도 제대로 뚫고 나오질 못한다. 그런데 지금의 가족관계에선 이 극하는 기운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p116. 연애는 드라마로, 섹스는 포르노로 배운다. 

특히 연애에 관한 모든 학습은 전적으로 드라마를 통해 이루어진다. 배우려고 해서 배우는 게 아니라 늘상 거기에 노출되어 있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세뇌를 당하는 편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멜로드라마는 일종의 ‘연애학 개론서’인 셈이다. 물론 이 개론서에선 성은 다루지 않는다. 그래서 성에 대해선 별도로 포르노를 통해 배운다.

 

p153. 사랑이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다. 즉, 내가 어떻게 관계를 구성하느냐가 사랑의 내용과 형식 모두를 결정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 존재의 궤적을 만든다. 존재의 흐름과 궤적, 그것을 일러 운명이라고 말한다. 내 운명의 주인은? 바로 ‘나’다. 그러므로 시작에서 종결까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다.

 

p157. 매뉴얼로 사랑의 열정을 체험하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 어떻게 아느냐고? 해보면 안다! 그건 마치 수영을 배운답시고 물 밖에서 수영교본을 달달 외는 것과 같은 행위다. 수백 권을 외워 보시라. 장담컨대 물 속에 들어가는 순간, 바로 가라앉는다!

 

p180. 사람들은 대개 통찰 대신 미력과 원한의 굴레 속으로 몸을 던져 버린다.

니체는 이 원한의 정신이야말로 약자요 노예의 정신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모든 원인을 남의 탓, 세상 탓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내 운명을 망친 것, 나를 비극으로 몰아넣은 것, 그 모든 것이 다 타자라면, 당연히 나는 내 운명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래서 노예라고 하는 것이다.

 

p182. 결국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건 나 자신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사건을 해석하는 ‘나의 망상체계’다. 그러므로 정말 복수하고 싶다면,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그런 인연의 장을 만든 자기 자신을, 자신을 얽어매는 온갖 망상들을. 그리고 나서 고개를 돌리고 성큼! 길을 나서라.

 

p199. 기념일에, 이벤트에 길들여진 사랑은 공허하다. 기념일과 이벤트라는 형식이 내용을 압도해 버리기 때문이다.(중략) 사회 전체가 그걸 부추기는 이유가 상업적 술수라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다. 그런데도 그런 술수에 계속 놀아난다면, 그건 정말 무지의 극치라 할밖엔.

 

p212. 사랑이 위대한 건 삶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지평으로 인도해 주기 때문이다. 만약 여러 번의 사랑을 했는데도 삶의 지평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면, 또 존재의 내공이 커지지 않았다면 그건 좀 의심해 봐야 한다 사랑이 아니라, 습관적 연애중독증일 가능성이 많다.

 

p214. 지금의 나의 초라한 욕망 –지식을 통해 타인을 지배하고 나의 소유를 증식하겠다는- 을 견고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결코 책이 아니다. 공자님이나 부처님의 말씀일지라도 그런 배치에 들어가면 그저 허접한 정보나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고로 책을 책으로 만들어 주는 건 책과 내가 맺는 ‘관계’속에 있다.


p219. 우리 시대가 즐겨쓰는 모티브는 꿈과 희망, 그리고 사랑 따위다. 꿈과 희망을 품어라, 사랑은 아름답다는 주문이 쉴 새 없이 쏟아진다.

그런데 꿈과 희망이 커질수록 세상과 일상은 하찮아진다. 그러면 그 공허를 메우기 위해 더 큰 꿈을 기획해야 한다. 더 큰 대회를 유치해야 하고, 더 “쎈” 이벤트를 해야 하고, 더 “어메이징한”쇼를 해야 한다. 대체 왜 그렇게 엄청난 꿈이 필요한 거지? 그러면 이렇게 답한다. 사랑을 위해서라고. 사랑만이 삶의 진정한 의미라고? 사랑의 본질이나 가치에 대해선 결코 묻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외울 따름이다. 더 놀라운 건 이때 사랑이란 ‘하는’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받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p258. 점성술이 번성할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운명으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다. 점쟁이한테 길흉화복을 묻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일어날 일은 어차피 일어날 것이고, 일어나지 않을 일은 어차피 일어나지 않는다. 그걸 족집게처럼 알아맞히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점이 무슨 묘기대행진도 아니고.

중요한 건 내가 나의 운명에 어떻게 개입할 수 있는가이다. 그러기 위해선 간절히 발원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 

발원한다는 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지도를 재배치하겠다는 실존적 결단을 의미한다. 

그때 명리학적 지혜가 필요하다. 내가 본래 가지고 태어난 카드를 통찰함으로써 어떤 패를 버리고, 어떤 패를 꺼내들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는 까닭이다.

 

p263. 운명이란 무엇인가? 길흉화복의 궤적이다. 사람들은 당연히 좋은 운이 오기를, 나쁜 운이 사라지기를 바란다. 여기서부터 꼬이기 시작한다.

좋은 건 내 탓이며 당연한 소치고, 나쁜 건 남 탓이고 세상 탓이다. 이런 마음 자체가 이미 운명과의 간극을 만들고, 이 간극만큼의 괴로움을 낳는다.

- 좋고 나쁜 것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만약 그 기준이 다르다면 길흉화복의 해석도 다 달라질 게 아닌가? 그렇다! 그것은 ‘하나의’ 척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게 정말 믿을 만한 건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저 어떤 시대, 어떤 집단의 통념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결국 길흉화복은 사람마다, 시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팔자를 능동적으로 장악하라는 건 바로 이 해석의 기준을 남에게 맡기지 말고, 스스로 마련하라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어떤 운명도 다 긍정할 수 있게 된다.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인연이 오면 오는대로, 가면 가는 대로,

자신의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그것보다 더 기막힌 길조가 어디 있으랴.

 

p279. 아무리 그럴듯한 지도를 그렸다 한들 대체 무슨 소용인가. 길을 나서지 않는 이들에게 지도란 한낱 종잇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건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