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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책 속 밑줄긋기

사회분야 추천도서] 팔꿈치 사회-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

핵심 한 문장,

소비자들이 소비중독에 빠질수록 노동자들은 일중독에 빠져들어야 하고, 노동자들이 일중독에 빠져들수록 소비자들이 소비중독에 빠져야 한다.


팔꿈치 사회의 저자 강수돌은,

나의 작은 실천이 참 행복의 길을 열고 사회도 바꾼다는 믿음에서 2005년 5월부터 2010년 6월까지 5년간 시골 마을의 이장을 지낸 바 있고, 현재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경영학부 교수이다. 

학교 근처 서당골에 귀틀집을 짓고. 가족과 텃밭을 일구며 세 명의 아이들을 자연 속에서 키웠고 자연이 주는 즐거움에 흠뻑 빠져 사는 그는, 돈벌이가 아닌 살림살이의 관점에서 사회와 삶을 바라보고 ‘아래로부터의 시각’으로 이웃과 역사를 바라볼 때 희망이 열리고 더불어 행복한 세상도 올 것이라 믿는다. 


책 속 밑줄긋기


팔꿈치사회는 옆 사람을 팔꿈치로 치며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치열한 경쟁사회를 말한다.


p6. 

우리가 아는 시장경쟁이란 기득권을 향한 경쟁이며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의 적대적 경쟁이다. 문제는 우리 대부분이 이를 당연시하고 이것 외에는 삶의 대안이 없다며 그런 논리를 굳게 내면화한다는 점이다.

(중략) 바로 그 경쟁이란 누군가 이득을 얻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것에 불과함을 폭로한다. 결코 인간 사회의 본래 모습이 아니란 말이다.

  

p24. 

오늘날 가정의 이미지는 더 이상 ‘보금자리(nest)’가 아니라 단순한 ‘버스정류장(bus-stop)’으로 변하고 있다. 가정은 노동에 종속되어 노동의 긴 여정을 다니기 위한 간이정류장으로 변했다. 아이들도 노동하는 어른들과 둘러앉아 삶의 의미와 행복을 나누는 시간을 함께 갖기 어렵다. 다만 그 간이정류장에 간간이 들러 냉장고 문을 열고 먹을 것만 챙겨 먹고 바삐 떠난다.

 

p27. 

돈의 논리가 삶의 논리를 대신하고, 마침내 삶 그 자체를 지배하게 된다. 그리하여 경제가 사회를 압도하고 병합해버린다. 이것을 범지구적으로 추진하는 움직임이 바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요, WTO요, FTA다. 안타깝게도 소수의 지배 엘리트들과 그를 추종하는 대다수 대중들은 “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고 하며 현실에 적응하기만을 강조한다.

이렇게 전도된 현실을 우리가 바로잡고자 한다면, 사유와 노동의 이분법,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 경제와 사회의 이분법을 과감히 넘어서야 한다.

 

p54. 

자본은 어떻게 해서 몸집을 효과적으로 불리는가? 바로 생존경쟁을 통해서다. 우선 각 나라별로 ‘국가경쟁력’을 드높이는 경쟁을 시키면 결론적으로 어느 나라가 일등을 하는가와 무관하게 경쟁에 참여하는 모든 나라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할 것이다. (중략) 

그 과정에서 사람과 자연이 훼손되고 파괴되어도 수출 경쟁력만 높인다면 좀 참아야 한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기업가나 정치가가 그렇게 말하고 언론이나 교육이 그 말을 이어받아 온 사회로 전파한다. 마침내 일반 사람들은 그 말을 굳게 믿고 내면화한다. 그렇게 해서 자본의 논리가 사람의 논리인 것처럼 둔갑하게 된다.


 p78. 막상 빈부격차가 날 수 밖에 없는 사회구조나 기득권 경쟁원리 자체를 바꾸자고 주창하는 이들은 별로 없다. 이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기득권 그룹은 기득권 자체를 누리면서 중독되어가고, 비기득권 그룹은 기득권 자체를 선망하고 열망하면서 중독되어가기 때문이다. 나는 이를 각기 향유중독과 동경중독이라 부르고 싶다. 결국 상층부건 중하층부건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기득권의 본질이나 원천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기득권을 차지하려는 강박에 사로잡힌 나머지 기득권 중독에 빠진 결과, 우리는 이 잘못된 게임 자체를 바꾸려하기보다는 너도 나도 그 속에 편입되기 위한 게임에 몰두할 뿐이다.

 

p82.  그러면 여기서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 사태의 본질이 이러한데도 왜 우리는 대개 소통과 연대를 하지 않고 경쟁과 분열에 빠지고 마는가?

그것은 앞서도 말했지만 우리가 기존 시스템, 즉 기득권 경쟁을 강제하는 사회경제 구조 자체를 바꾸려 하기보다는 그 속에서 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될까?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감히 내가 이 구조를 바꿀 수 있단 말인가?’하고 아예 처음부터 체념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나도 저 위의 높은 사람들처럼 강자가 되어 기득권을 맘껏 누려야지’ 하고 욕망하며 ‘강자 동일시’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변화를 꿈꾸기보다 이런 강자 동일시의 태도를 갖게 될까?

그것은 한편으로 변화를 꿈꾸던 사람들조차 좌절하거나 핍박을 받고 상처를 받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그저 주어진 현실 구조에 잘 적응하여 상부(권력자)로부터 인정받고 출세한 사람을 보면서 ‘나도(저 사람처럼) 할 수 있다’는 꿈을 꾸기 때문이다.

요컨대 저항과 억압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성공한 자에 대한 부러움이 한데 섞인 결과, 우리는 ‘강자 동일시’ 심리를 강하게 내면화한다.

 

p111. 기득권층은 기득권에 중독되어 변하지 못하고 비기득권층은 기득권을 동경하고 강박적으로 집착하기에 변하지 못한다.

 

p117. 일류대나 일류직장은 소수에게만 기회가 주어지지만 일류인생은 누구에게나 열린 기회다.

 

p220.  우리들의 모든 삶의 과정이 ‘상품화’한 것이 바로 오늘날 ‘서비스 경제’라 불리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친밀함과 우정, 환대, 사랑의 관계를 만들고 확인하고 나누던 행위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두 ‘서비스 경제’라는 이름으로 돈벌이 수단이 되고 있다. 예컨대 아이를 잉태하거나 낳는 행위(정자/난자 은행, 산부인과 병원), 아이를 키우는 행위(유아원, 놀이방, 학교, 학원), 식의주 등 살림살이 행위(식당, 세탁소, 주택 시장), 어려울 때 돕기(금융, 사채, 보증, 보험), 문화 향유(콘서트, 콩쿠르), 여가(여행, 관광, 엔터테인먼트), 소통(정보통신, 전화, 인터넷), 

그리고 심지어 사랑 행위(성매매, 전화방, 섹스 쇼)까지도 온통 ‘서비스 경제’ 속으로 편입되고 말았다. 그 결과 서비스는 있되 참된 봉사는 없고, 학교는 있되 참교육은 없다. 또 고급 아파트는 있되 참살림은 없고, 레스토랑은 있되 참 먹을거리는 없다. 사실이 이럼에도 오늘날 주류 경제학에서는 서비스 경제, 즉 3차산업이 발전할수록 ‘선진국’이라는 잘못된 관념이 지배하며 현실 삶을 피폐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