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직업 & 취업 & 자격증/생생한 현장 이야기

미국인턴생활기 | 뉴욕에서 인턴하며 스타트업 창업... 불가능?!

불가능을 풀(full)가능으로 뉴욕 인턴의 스타트업 창업 스토리

홍석희 [미국 | IT 광고 플랫폼 제작]

 

 


“한국 분이세요?”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 옆에 앉은 아주머니께서 말을 거셨다. 거의 일 년 만에 써 보는 한국말이 어찌나 어색하던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자 정말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실감이 났다. 25세라는 조금은 늦은 나이에 영어 공부를 시작하여 처음으로 홍콩에 교환학생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을 때는 정말 뛸 듯이 기뻤다. 진해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가본 곳이라곤 제주도가 전부였던 내게 세계 각국에서 온 친구들을 만난다는 건 두려움을 동반하면서도 설레는 일이었다.

 

대기업 신입 사원을 포기하다

교환학생을 다녀온 후, 한 학기만을 남겨 뒀던 대학교 생활의 마지막 종착역인 졸업과제를 발표하며 교수님께 들었던 첫마디는 ‘꼴통들’이었다. 공대 특성상 군대식이고 강압적인 학교생활에 억지로 맞추어 가며 모든 취업 준비생들처럼 인적성, 대외 활동, 영어 성적 올리기에 열을 올렸고 정말 운이 좋게도 외국계 기업인 A사에 취직할 수 있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집, 회사, 집을 반복하는 쳇바퀴 생활과 법인카드가 주는 달콤한 유혹에 조금씩 넘어갈 때 즈음 첫 월급이 나왔고, 나는 개선장군이나 된 듯 부모님께 내의와 용돈을 드렸다. 태어나서 그렇게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부모님의 모습이 처음이라 나도 덩달아 장남으로서 뿌듯함을 느꼈다.


그날 저녁, 합격 통보가 없어 탈락한 줄만 알았던, 석 달 전에 면접을 보았던 뉴욕의 IT 기업에서 아직 구직 중이라면 인턴으로 채용할 용의가 있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좋은 커리어와 꽤 높은 연봉이 보장되는 안정적인 직장을 생각하면 당연히 이메일을 무시해야 했지만, 매일 똑같은 직장 생활 속에서 잊어버렸던, 세계를 무대로 뛰며 내 꿈을 펼치고 싶다는 열망이 다시 한 번 고개를 들었다. 세계 최고의 도시 한복판에 위치한 광고 회사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할 기회를 놓치면 30대가 되어 후회하지 않을까? 부모님이 가장 기뻐했던 날, 죄송스럽게도 찬물을 끼얹는 소식을 전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부모님께서는 내 결정을 지지해 주셨고, 회사를 다닌 지 석 달도 되지 않아 사직서를 제출했다. 취업이 어려운 시기에 대학을 졸업하고도 다시 직장이 없다는 것이 두려웠지만, 스티브 잡스가 말한 ‘Keep looking, Don’t settle’을 되뇌며 새로운 여정에 첫발을 디뎠다.


뉴욕으로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직장을 그만두는 시기에 바로 발급이 될 줄 알았던 비자는 분기별 신청자가 초과되면서 다음 분기까지 밀려 버렸고 집에서 부모님의 따가운 눈총을 피해 하루 종일 도서관, 카페 등을 전전하였다. 언제까지 비자만을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해 비자가 나올 때까지 무작정 미국을 여행해 보기로 했다. 마침 디트로이트로 가는 항공권이 가장 쌌기 때문에 다음 날 바로 디트로이트행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에 오긴 했지만, 연고도 지낼 곳도 경비도 없어 다음 날부터 생활하는 것이 막막했다. 

다행히 홍콩에서 만났던 친구가 자동차로 세 시간 거리에 살고 있었기에 그 친구 집 소파에서 잠시 묵을 수 있었다. 다음 날부터 Tawas라는 해변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위해 종일 돌아다녔다. 눈에 보이는 모든 식당에 들어가 일을 할 테니 식당에서 지낼 수 있게 해 달라며 도움을 구했고, 다행히도 마음 좋은 멕시코 사장님의 도움으로 해변가에 위치한 작은 레스토랑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엔 음식 재료도 낯설고 주문을 알아듣는 것도 서툴러서 웃지 못할 해프닝들이 많이 생겼지만, 두 달간 어떤 영어 학원을 다닌 것보다 영어 실력이 크게 늘었을 뿐만 아니라 사장님과 트레일러에서 같이 살며 저녁엔 함께 낚시를 다니고 낮에는 해변에서 일하는 정말 잊지 못할 여름을 보낼 수 있었다. 

해변에서의 일이 몸에 익어 갈 때 쯤, 스폰서 기관에서 비자가 나왔다는 통보를 받았고 두 달간 함께 지냈던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다시 몸을 실었다. 임시로 구한 숙소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초등학교 때 영어 학습지에서 배운 브로드웨이나 자유의 여신상을 직접 보니 뉴욕에 정말로 와 있다는 실감이 났다.

 

뉴욕에서 꿈을 만나다

“Wow. You are overdressed!” 출근 첫날, CEO Mike는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로 반갑게 맞아주며 너무 차려입었다며 잔뜩 얼어 있는 나를 놀려댔다. 자유분방한 스타트 업답게 청바지에 티만 입고 다니는 회사에 정장 차림으로 갔으니 얼마나 튀었을까. 서로 guys라고 부르며 격식을 차리지 않고 끊임없이 농담을 서로 날려대는 모습이 한국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Look Smart라고 하는 이 IT 광고 회사는 광고주들의 웹페이지나 스마트폰을 제작해 주고 광고 컨설팅뿐만 아니라 방대한 양의 온라인 광고 데이터들을 광고 회사들에 제공해 주는 스타트업 회사이다. 내가 주로 맡은 업무는 광고주들을 위한 스마트폰 앱을 제작하는 일이었다. 대학에서 배운 지식으로는 따라가기 벅찬 부분이 많았으나 IT 디렉터로 일하는 Ryan은 정말 영화에서나 볼 법한 천재적인 발상과 방대한 지식으로 항상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주곤 했다.

프로그래머로서의 경력을 쌓기 위해서 미국에 오긴 했지만 정작 내가 관심이 있었던 분야는 디자인이나 프로젝트 매니지먼트였다. 개발자와 디자이너, CEO 간의 소통의 중요성이 대두되는 요즘, 중간에서 프로젝트를 조율할 수 있으면서도 개발자와 디자이너의 업무를 소화해 낼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가 모든 프로젝트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전공 외에는 다른 업무를 할 수 없었던 이전 직장에 비해, 내가 원하고 관심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런 쪽의 프로젝트가 주어지는 스타트업의 업무 스타일은 회사를 직장이라기보다는 열정을 분출할 수 있는 놀이터로 만들어 주었다.


최근에는 패션 잡지인 맥심의 새 웹사이트를 제작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는데, 미국의 큰 회사에서는 어떤 식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일을 진행하는지 알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스타벅스 커피를 들고 3분 정도 잡담을 하다가 어느 순간 중요 사항에 대해서만 신속하게 회의를 진행하고 필요한 사람들끼리 따로 만나 아주 실속 있게 일을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미팅에서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중요했는데, 슈퍼바이저인 JC는 미팅마다 프레젠테이션을 시키거나 맥심 직원들의 트레이닝을 맡기기도 하는 등 어려운 과제를 주어 나를 당황하게 했지만, 여러 가지 경험을 시켜 주려고 배려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물론 영어로 일한다는 것이 많은 부담이 되었지만 서투른 영어에도 뻔뻔하게 말하는 내 모습이 우스웠던 건지 마음에 들었던 건지 맥심의 디자이너들과는 금세 친해져서 아직도 연락하고 가끔 식사를 하기도 한다. 이렇게 자유분방하고 수평적인 미국 회사지만 자기 포지션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사람은 프로젝트가 끝나고 금세 해고된다. 철저히 능력 위주로 평가하는 미국 사회의 양면성이라 할 수 있다.

스스로 인턴이라는 타이틀에 주눅 들기보다는 나도 팀의 일원이라는 생각으로 더 나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항상 제시하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제안하는 등 적극적으로 일하자 맡게 되는 역할도 점점 커졌고 회사 사람들도 미팅 때마다 기술적인 부분은 나에게 도움을 구하는 등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업무 면에서는, 정말 감사하게도, 내가 꼭 하고 싶었으나 한국에서는 기회를 찾을 수 없었던 일들을 마음껏 경험하고 있었으나 뉴욕 생활에 항상 좋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뉴욕의 살인적인 물가와 방세를 감당하지 못해 한 달 내내 친구들의 소파를 전전하며 살기도 했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운 적도 셀 수 없었다.

 

불가능을 풀(full)가능으로 만들다

IT의 성지 실리콘 밸리 못지않게, 뉴욕에도 하루에 수백 개의 회사들이 새로 만들어지고 또 망하기도 한다. 대기업이 아닌 스타트업에서 일하면서 느낀 바는 살아 있다는 느낌이었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바를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니고 24시간이 모자라도록 자신이 원하는 업무에 열중하는 모습이 너무나 멋지게 보였다. 

비록 작은 회사의 인턴으로 일하고 있지만 나도 꼭 스타트업 창업에 도전해보겠다고 다짐했다. 자금도 인맥은 물론 영어마저 부족한 내가 미국에서 창업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다소 실현 가능성이 떨어져 보일지 모르나, 도전하는 것 자체로 가치 있는 일이고 실패를 하더라도 다음 도전을 위한 밑거름이 될 거라 생각했다.


6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미국에 있으면서 느낀 바는 미국은 문화의 다양함에 비해 배려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광고의 경우, 이민자 수가 미국인만큼이나 많은 데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광고가 영어로만 되어 있을 뿐 아니라 미국인의 시각에 맞추어 제작되고 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내 입장에서는 가끔 한국어로 광고가 나오면 더 눈길과 정이 간다. 인터넷상에서 구글이 사람들의 기호를 분석하여 다른 검색 결과를 보여 주는 것처럼, 광고 또한 사용자의 언어나 문화를 인식하여 맞춤형으로 제작되면 분명 더 뛰어난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큰 기업들이 그러한 광고를 제작하기는 하지만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대부분 영어 광고만 내보내고 있다. 나는 광고를 새로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웹·앱상에서 사용자에 따라 언어를 전환하고 거기에 문화적 차이점을 반영하는 광고 플랫폼을 저렴한 가격으로 만들어 내고 싶었다.


아이디어와 기술은 있지만, 사업 경험이 전무한 나로서는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생각만 하다가 사라지는 아이디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작정 부딪쳐 보기로 했다. 다음 날부터 매일같이 뉴욕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IT 컨퍼런스에 참여하여 제2의 마크 주커버그를 꿈꾸는 수많은 열정적인 사람들을 만나 보았고, 그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명함을 돌리고 밤에는 이메일을 보내면서 내 생각을 전달하고자 애썼다. 하지만 자금도 없고 미국 시민권자도 아닌 나를 믿고 투자해 줄 사람을 찾을 수 없었을뿐더러, 비웃음과 무시를 받고 좌절하기도 했다. 

이대로 한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잠도 줄여가며 두 달 넘게 끈질기게 다른 회사에서 온 사람들을 붙잡고 설득하고 이메일로 연락한 결과, 마침내 광고계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는 Dennis에게서 내 아이디어에 관심이 있다는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필리핀에서 온 이민자로 나와 비슷한 불편함을 느꼈던 그는 내 아이디어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였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에디터로서의 인맥과 지식, 자금을 투자할 테니 함께 창업을 하자는 제안을 해왔다. 

곧 만료되는 비자 문제 또한 자기가 CEO로 있는 스타트업에서 스폰서를 해 주기로 하였다. 수천 통의 이메일과 두 달간의 고생이 정말 꿈같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아직은 Dennis의 작은 거실이 사무실이고 작업 공간이지만 일로 바쁜 와중에도 시간만 나면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짜내고 웹과 앱의 시험판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11월에 열리는 스타트업 컨퍼런스에 투자를 받기 위한 출품을 앞두고 있다.


아직 성공이라는 단어를 쓰기엔 너무나도 부족하다. 

여전히 나는 인턴으로 일하고 있고, 미국 취업 비자의 전환율은 50%가 되지 않으며, 이제 막 시작한 사업이 잘될지도 불투명하다. 이러한 불확실함 속에서도 미국에 오기로 한 결정을 한 번도 후회해 본 적 없다. 

미국에서의 경험으로 내가 무엇을 잘할 수 있을지 알게 되었고, 내 꿈에 대해 확신도 가질 수 있었다. 

같은 꿈을 품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실제로 작지만 꿈을 이루기 위한 첫 발걸음을 시작하기도 하였다. 남들은 이해 못할 행동이었을 수도 있으나 안정적이고 불편함 없는 생활을 포기했던 결정이 불가능을 풀(full)가능으로 만들어주는 첫 열쇠였다고 생각한다. 

실패를 통한 배움이나 결핍이 없이 자신이 무엇을 잘 하고 어떤 일에 열정이 있는지 알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얼마만큼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지 아직 잘 모르는 분들께 꼭 해외 진출에 도전해서 부딪쳐 보며 불가능을 풀(full)가능으로 만들라고 말하고 싶다.

 

*출처: 월드잡 (www.worldjob.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