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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취업 & 자격증/생생한 현장 이야기

싱가포르 취업수기 | 반도체 구매 담당 바이어, 협상전문가로 일하기까지.

나는 간절했고 나는 노력했다

정승규 [싱가포르 | 콘티넨탈 바이어]

 

 


108억 7천5백만 원. 이 글을 시작하기 바로 전까지 한 업체와 가격 협상을 하던 프로젝트의 구매금액이다. 

나는 2014년 기준, 전 세계 자동차 부품업 1위 기업인 독일의 콘티넨탈에서 반도체 구매를 담당하는 바이어이자, GM대우/지멘스 등의 구매 팀을 거쳐 10년 이상을 부품 업체 선정과 가격 협상만을 위해 일해 온 협상 전문가이기도 하다. 

아시아 금융의 새로운 허브이자, 아시아와 서양의 모습을 고루 간직한 작은 나라 싱가포르에서 2년째 살고 있다.

 

호주에 첫발을 내딛다

내게 고교 시절의 영어는, 대입을 위한 과제였고 그저 어렵고 두려운 외국의 언어였다. 단어 몇 개로 시험 지문을 겨우 유추해 내던 실력을 가졌던 내게는 특이하게도 해외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하지만 2003년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던 이유는 외국에서 일하는 색다른 경험 때문이 아니었다. 

여유와 낭만이 있는 생활을 상상한 것도 아니었다. 당시에 나는 꿈에서 자주 외국인과 대화를 할 만큼 외국 경험에 대한 갈망이 있었으나 돈이 없었고, 공무원으로 평생을 살며 세 아들의 대학 교육을 시키시는 부모님께 어학연수라는 말을 꺼내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러던 중 큰형이 준비하다 포기했던 워킹홀리데이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내 힘으로 처음 가치 창출을 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선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으며 즐거운 마음으로 매일매일 영어를 준비했다. 

유학은 우리 집과는 거리가 먼 얘기였지만 워킹홀리데이는 당시 내게 없는 돈으로 유학 흉내를 낼 수 있는 단 하나의 기회였다.


가기 전의 준비 과정은 현지에 가서 느꼈던 감정과는 또 다른 설렘과 흥분을 줬다. 호주 땅에 첫발을 내딛던 감동과 설렘, 습했던 공기, 두려움은 1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매년 수 개국을 몇 주씩 출장 가는 지금에도 말이다. 

첫 두 달간은 어학원 생활을 하며 기본 회화의 자신감과 친구를 얻었고, 그곳에서 사귄 일본인 친구와 함께 농장에서 일하는 틈틈이 다닌 여행은 일과 휴식의 즐거움을 주었다. 힘들었던 시간이었던 만큼 기억에 오래 남았고, 값진 경험을 통해 세계는 정말 넓고, 할 일은 더 많다는 사실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다만 한국에서 간간이 이메일을 통해 들리던 친구들의 취업 소식은 당시 정체되어 있던 학업과, 경제적 부담감을 안고 있던 내게 더 더욱 고민거리가 되었다. 그때는 해외 경험이 훗날 귀중한 자산이 될 거라는 생각과 동시에 내가 남들보다 뒤쳐져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공존했다.

1년간의 호주 생활에서 돌아와 대학 4학년생으로서 본격적인 취업 준비를 하게 되었다. 글로벌 인재가 되고 싶었기에 외국계 회사에 가고 싶었고, 안정적인 생활도 생각해야 했기에 대기업을 간절히 원했다. 몇 번의 도전과 노력 끝에 서류 통과와 면접의 기회가 주어졌고 외국계 자동차 기업(당시 GM대우, 현 GM코리아)의 구매 팀에 입사하게 되었다.

 

글로벌 인재를 꿈꾸다

회사에 들어가면 더 이상의 자기 계발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입사 이후에 많이 달라졌다. 

글로벌 기업의 모든 업무들은 전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데, 특히 구매의 경우는 구매가격의 혜택을 보기 위해 전 세계 물량을 취합하여 통합 구매를 하는 방식이 흔했다. 


이로 인해 같은 아이템을 담당하는 전 세계의 바이어들이 하나의 팀으로 긴밀히 협력할 필요가 있었다. 부족하긴 했지만 그 시간들을 통해 많이 배우고 스스로 매우 발전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전까지 난 그저 이력서에 들어갈 한 줄의 해외 경험을 위해 호주에 갔다 온 사람이라 생각하기도 했지만, 호주의 치열했지만 소중한 1년이 없었으면 회사 내의 글로벌 업무가 주어지지 않았을 건 분명했다.


당시 회사는 외국자본에 인수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많은 혼란이 있었는데 한국의 기업 문화와 미국의 기업 문화가 충돌하며 갈등이 빚어져 힘들어하는 사원이 많았다. 영어로 대화가 가능했던 젊은 사원들은 회사의 입이 되어야 했기에 많은 기회가 주어졌지만 미국 본사 세력의 간섭에 대한 방어막도 되어야 했다. 나는 새로운 경험과 기회에 대한 갈망으로 헤드헌터를 통해 이직을 결심하게 되었고, 당시 세계 기업 영향력에서 삼성을 앞서 있었던 지멘스(이후 지멘스의 자동차 사업부가 Continental Automotive에 인수됨)라는 독일 기업의 한국 지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주로 한국 업체를 담당하는 바이어로 시작했지만, 외국 업체와 거래를 하던 경험이 빛을 발하고, 조직 변경이 있을 때 윗분들의 눈에 띄어 곧 본사 소속으로 아시아 담당 업무를 하게 되었다. 수년 전 영어 인터뷰도 힘들어하던 실력은 회사 내의 경험으로 인해 향상되어 있었고, 외국인들과 자연스레 어울리던 경험은 독일 본사 사람들과의 관계도 전혀 낯설지 않게 해 주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독일 본사 사람들과의 업무가 많다 보니 항상 고민거리는 그들과 경쟁해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글로벌 기업에서 일하는 독일인들의 영어는 매우 뛰어나다. 특히 대외 업무가 많은 바이어들은 원어민과 같은 수준의 달변을 보여 준다. 그래서인지 프레젠테이션을 하면 적절한 유머를 섞어가며 청중을 이끄는 그들에 비해, 나는 콘텐츠는 자신 있었지만 여유가 없어 보였다.


나는 내 한계를 벗어나 한 단계 성장하기 위해 외국 생활을 계획했다. 

싱가포르는 공용어로 영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가족들이 적응하는 데 크게 어렵지 않을 것 같았고, 중국계 싱가포르 사람들이 인구의 70%여서 문화적 이질감이 덜하며, 흔히 북미나 유럽에서 당할 수 있는 인종차별에 대한 우려가 없었다. 강력한 법치국가로 치안이 안전했으며, 당시 많은 기업들이 아시아 본사를 상해나 홍콩에서 싱가포르로 옮기는 추세이기도 했다. 많은 도전과 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싱가포르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찾기 시작했다.

나는 팀과 전체 구매 조직에 매년 아시아 관련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일을 시작했는데, 중국인과 중국 시장을 궁금해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큰 지지를 얻었다. 

팀 내에서 유일한 아시아 사람이었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고, 이것이 적중하여, 나는 아시아 전문가로서 누구든지 아시아 관련 업무는 내가 어떻게든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 주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전체 그룹 부사장과의 점심식사가 있었다. 회사 구매 그룹 전체 내의 몇 안 되는 아시아 사람들과 함께했던 매우 형식적인 식사였기에 업무 이야기는 꺼내지 않던 것이 일반적이었고, 힘든 일이나 하고 싶은 얘기가 없냐는 질문에는 침묵으로 끝내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고, 이번이 아니면 스스로의 계발을 위해서라도 회사를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있던 차였다. 식사가 끝날 무렵 자리를 일어나려는 임원들에게 내 스스로의 가치와 능력과 싱가포르에 대한 전략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별 얘기가 없는 식사 자리를 생각했던 일부 임원들은 당황했겠지만, 다행히도 부사장님은 흥미롭게 내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셨고, 아마도 침묵하는 다른 아시아인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결국 그 자리에서 싱가포르 근무에 대한 동의를 구할 수 있었다. 실패하면 이직까지 고려할 정도로 절박한 상황이었지만, 용기와 계획된 준비가 있었다. 그리고 11개월 후 6년을 함께했던 한국 지사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과감히 싱가포르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지금이야말로 세계 무대로 나갈 기회이다

나는 이 모든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고 준비했던 사람은 아니다. 

그저 젊은 시절 내가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이 내게 도움이 될까에 대한 생각을 조금 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 글을 읽고 있을 분들은 다르길 바란다. 


미래를 위한 자신만의 준비를 하되, 꿈이 가까워진다는 즐거운 상상을 함께 곁들이길 바란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함께 보냈더라도 그 시간을 내 미래를 상상하며 열심히 또 즐겁게 준비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저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는 사람을 많이 보아 왔다. 흔히들 준비된 사람에게만 기회가 온다고 한다. 각각의 시대에는 그 시대가 원하는 요구가 있지만, 그 요구는 매번 진화하기에 미리 움직여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한다.


EU 출신들은 국경이 없는 하나의 공동체에서 자라 왔기에 국제 감각을 자연스레 익혀 왔고, 영어에도 크게 불편함이 없다. 성격 또한 매우 적극적이고 유머가 있어 사교적 성향이 짙다.북미는 영어 원어민이며 이민자 국가라는 특수성이 있고, 남미는 지리적·경제적 이유로 북미와 교류가 활발하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라 불릴 만큼 다국적 기업의 집합소이며 제조업이 강해 그 규모가 매우 크다. 그에 반해 한국은 어떠한가? 삼면이 바다이고 북한과의 단절로 육로가 막혀 있다. 학창 시절 십 년 이상을 배워도 영어 소통이 불가능하고, 소수의 대기업이 이끌어 가는 불안정한 산업구조를 갖고 있다. 국민들의 해외 교류도 적다. 많은 IT 기업의 인재들이 인도 사람들로 채워지고, 세계 경제에서 중국 기업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다.


나는 지금 싱가포르에서 2년째 근무 중이다. 독일 회사에서 영어와 국제 감각이 뛰어난 싱가포르 현지인을 채용하지 않고 굳이 특혜를 주어 가며 비싼 값에 한국인을 한국에서 데려온 것은 무슨 이유일까? 

한국인의 특징은 뭐든 빠르게 처리하는 업무 속도와, 스스로에게 정직한 근무 태도, 그리고 책임감이다. 

회사에 대한 애정과 충성심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 기업의 약진과 정치적 문화적 교류로 이제 세계의 기업들도 한국과 한국인에 익숙하다. 또한 기업은 인재를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지금이 기회이다. 글로벌 기업이 원하는 준비된 사람이 되어 반도를 벗어나 세계 무대에서 내가치를 찾아보길 권한다. 그런 인재들이 국제 감각을 바탕으로 기업과 사회를 움직인다면 지리적인 고립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또 세계의 인재를 한국으로 끌어모아 궁극적으로 한국의 국제화를 이룰 수 있다.


싱가포르에 나와 있으며 느낀 것은 싱가포르 학생들의 글로벌 플레이어로서의 성장잠재력이다. 

영어 공용어에 여러 인종이 어울려 지내고, 정부는 모든 기업의 채용에서 내국인에 대한 특혜를 베푼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은 세계 유수 기업의 아시아 지역 본사를 싱가포르로 끌어모았다. 나와 같은 외국인이 바라보기에는 정말 부러운 환경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칫 본인 개인의 가치와 돈을 좇기 쉬운 싱가포르 사람들과는 달리, 한국인들은 내 나라를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과 애국심이 유별나며 어디에 있든 한국인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돕고 뭉치고 있다. 

한국의 위상은 날로 높아져가고 있다. 11년 전 호주에서 삼성을 일본 기업과 헷갈려 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K-Pop과 한국 드라마에 열광하고 런닝맨의 자매 프로가 중국 대륙의 국민프로가 되고 있다. 싸이의 말춤은 전 세계의 공통 코드로 통하고, 김치, 비빔밥, 불고기로 대표되는 한식의 역습이 일본의 스시를 위협한다.


나는 여전히 싱가포르 동료들과 치열한 경쟁 중이다. 하지만 이제는 어린 시절부터 영어와 중국어(또는 말레이어, 타밀-인도어)를 동시에 자유롭게 구사하는 이들과의 경쟁에서 쉽게 지지 않고, 수십억에서 수백억의 소싱을 진행하는 자동차 부품 바이어이자 현지 구매 팀 매니저 중 한 사람이다. 

내가 스스로를 빛내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이상 회사는 나에게 꾸준한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는 것을 그간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기에 중국어도 틈틈이 공부하며 다음 도약을 준비 중이다. 한국의 젊은 동료들과 후배들도 세계를 무대로 당당히 겨뤄 보길 권한다. 

대학 시절 호주 땅에서 새벽 5시부터 나가야 했던 농장 일과 밤낮이 바뀐 PC방 일을 경험하면서도 나는 글로벌 인재가 되어야겠다는 막연한 희망으로 노력하며 살았다. 볼품없던 호주에서도, 한국에서도, 또 지금 여기 싱가포르에서도 변함없이 나를 지지해주고 사랑해주는 내 아내와, 아내를 똑 닮아 더없이 예쁜 세 살 난 딸 채린이를 위해 지금도 미래를 꿈꾸며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출처: 월드잡 (www.worldjob.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