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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취업 & 자격증/생생한 현장 이야기

영어 못하는 제주도 시골아가씨의 글로벌 도전기

괜찮아, 청춘이야

김윤주 [미국 | 힐튼 계열 호텔 인턴]

 

 


제주도 시골 처자, 작은 희망을 안고 호주 땅을 밟다

나는 경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시골 마을의 가난한 집 둘째 딸로 태어나 학교가 끝나면 밭으로 나가 일손을 돕거나 친구들과 바다에 뛰어들어 놀았다. 

나는 지방 국립대에 진학했고, 다행히 원하는 학과에 들어갔지만,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쌓여 갔다. 막연한 희망을 붙잡고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휴학을 하고 새벽 5시에 일어나 호텔에서 기념품을 판매하는 아르바이트와 카페 직원을 병행하며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냈다. 공부할 시간이 없었기에 출퇴근 버스에서 영어 공부를 했고 커피를 만들면서도 하루에 열 문장씩 꼬박꼬박 외워 가며 출국 날을 기다렸다.

 

삶은 목표대로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성장한다

처음 호주 땅을 밟은 날. 나에게 희망을 불어넣듯 스쳤던 바람과 그 냄새는 잊을 수가 없다. 무척이나 신선했고 그저 행복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내렸던 소나기는 밝았던 내 마음을 그늘로 만들어 버렸고 앞으로의 내 모습을 대변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전화기를 개통하기 위해 들어갔던 핸드폰 매장에서 결국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의사 표현 한 번 못해 보고 보기 좋게 비웃음거리가 되었던 순간. 점심을 먹기 위해 가장 친근한 맥도날드로 들어갔지만 주문을 못해 그 바쁜 점심시간에 내 뒤로 줄을 한참 만들어야 했던 순간. 

간단한 주문마저 망설이던 내 모습이 정말이지 작다 못해 부끄러워 어디든 숨고만 싶었다. 과연 내가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불과 얼마 되지 않던 짧은 시간에 벌써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시작도 해보지 않고 떠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 한 달 동안 영어 공부에 모든 걸 걸겠다는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온 뒤, 정말 최선을 다해 영어 문법 다지기와 스피킹을 위한 절박한 계획을 세웠다.

 

호주 퍼스 매출 1위 카페의 일원이 되다

스스로에게 약속했던 한 달이 지나고 이제는 일을 구해야 했다. 

남들처럼 농장이나 공장에서 일하고 싶지는 않았다. 관광 경영이라는 커리어에 맞는 일, 혹은 서비스 분야 일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남들처럼 스펙이 좋은 것도 아니요, 외모가 뛰어난 것도, 그렇다고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걱정이 앞섰다. 내가 선택받을 수 있는 곳은 어딜까 고민 끝에, 호주의 축복받은 날씨가 느껴지고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노천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선택받지 못한다면 반대로 선택해 보는 건 어떨까? 카페에 취직하기 위한 나름의 전략을 짰다. 

우선 부족한 영어를 감추기 위해 내 자신을 어필할 수 있는 문장들을 만들어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었고 한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갈고 닦았던 라떼 아트 실전을 위해 유튜브를 보며 몇 시간이고 스텝을 익혔다. 

나는 할 수 있다, 자신감 넘치는 미소와 공들여 만든 이력서를 가지고 당차게 사장님으로 추정되는 분에게 말을 건넸다. 

라떼 아트에 자신이 있다는 메시지와 함께 당당하게 마무리하니 귀찮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시선이 바뀌고 들어와서 직접 만들어 보라는 기회가 주어졌다. 익숙했던 기계가 아니었고 호주에 오면서 오랜 시간 커피를 만들어 보지 못했기에 걱정이 앞섰지만, 절박한 심정으로 스텝을 살려 정성을 다해 플랫화이트를 만들었다. 감사하게도 커피 잔에는 어여쁜 하트가 만들어졌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바로 트레이닝 날짜를 받게 되었다.

 

호주에서의 영구적인 삶? 호주 취업 비자 제안을 받으며

호주 퍼스의 날씨는 유난히 맑다. 

일요일이면 가족들과 함께 브런치를 먹으러 오는 손님들, 아침 출근 시간에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손님들, 특히 신문을 읽으며 휴식을 취하기 위해 오시는 중년을 넘긴 나이 지긋한 어른들을 보면 행복한 마음이 들곤 했다.

트라이얼을 받으며 호주 카페 시스템이며 손님들의 성향 등을 파악할 수 있었고 여러 국적의 친구들도 생겼다. 부족한 영어는 금세 들통 나서 한동안은 주방 보조와 설거지 신세를 면치 못했지만 늘 긍정적인 자세로 임했다. 


일이 끝나도 더 배우기 위해 주변을 도왔고 혼자 오는 단골손님들에게 인사하며 짧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일하는 시간이 기다려졌고 어느새 내 영어 실력도 많이 늘어 있었다. 진심이 통했는지 어느 날부터인가 스케줄 표에 내 로스터가 부쩍 늘어났고 심지어 3개월 정도 지났을까, 믿을 수 없었지만 매니저가 되었다.


단골손님들의 특색을 파악하고 조금이라도 늦게 오시거나 일찍 오시면 “오늘은 늦게 오셨네요? 카푸치노 머그 사이즈 맞으시죠?” 주문도 하기 전에 수다를 늘어놨다. 단골손님들이 많이 생겨났고 내가 오지 않는 날에는 나를 찾으시는 손님이 생길 정도였다. 

어느 날은 평소에도 내 미소를 보면 하루의 힘이 난다는 할아버지께서 나에게 행운을 빈다며 로또를 건네주셨다. 부모님께 효도하라며 항상 똑같은 말씀을 반복하시던 손님이었는데,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어 고맙다며 선물을 준 것이었다. 마음이 짠했다. 

밸런타인데이, 크리스마스가 되면 타지에서 고생한다며, 혹은 맛있는 커피 고맙다며 많은 손님들이 선물을 주었다. 생일 땐 용돈도 받아 보고, 어여쁜 공책과 볼펜, 귀걸이, 초콜릿, 선물 공세가 이어졌다. 베풀고 나누고 사랑하는 그들의 일상적인 모습에 난 완전히 매료되었고 더욱 진정성을 가지고 하루하루에 임할 수 있었다. 그런 덕분인지 빠른 시간 안에 사장님으로부터 스폰서 비자 제안을 받게 되었고 주변의 다른 카페에서도 같은 제안을 받게 되었다.


바리스타 매니저로 일하며 나는 남들과 다른 차별성으로 자신을 포장할 줄 알아야 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는 삶의 원리를 배우게 되었다. 내가 발견한 나만의 차별성은 진실한 마음이었다. 누구보다 먼저 밝게 인사했고 손님들의 사소한 것 하나까지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다. 단골손님들이 생겨났고 그분들이 나의 가치를 높여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민 끝에 사장님의 제안을 거절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도전할 수 있는 수많은 길이 있을 텐데 인생의 전반전에서 내 인생을 하나로 규정하고 싶진 않았다. 호주라는 나라가 주는 평화로움과 여유로운 삶을 택하기엔 나는 아직 젊었고 도전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다.

  

뉴욕, 꿈의 도시 뉴욕에서의 호텔 실습

다시 한국의 관광경영학과 09학번 학생으로 돌아왔지만 단 한 번도 내 결정에 후회한 적은 없었다. 내 전공 공부가 예전보다 재밌게 느껴졌고 여행하며 이용했던 여행사 서비스, 항공 서비스 등의 모든 관광 서비스 분야가 흥미롭게 느껴졌다. 


만약 호주를 다녀오지 않았다면 어쩔 수 없이 졸업 학점을 채우며 의미 없이 학교를 다니고 있었겠지만 24살의 나는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모든 과목의 성적이 A+가 되었고 호주에서의 바리스타 매니저 경력 덕분에 방학 동안 미국에 있는 호텔로 실습을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항공비뿐만 아니라 생활 비용, 에이전시 비용 등 상당한 지원금이 주어졌고 나는 설렘을 가지고 새로운 시작을 위한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가장 가 보고 싶은 나라가 어디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줄곧 뉴욕과 파리라고 말해 왔다. 

영어 공부하겠다며 매일같이 공부 반, 눈 호강 반으로 보았던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배경이 된 이 두 도시는 나에겐 정말이지 생각만으로도 설레고 잠 못 이루게 하는 도시였다. 

그런데 제주도 농촌 출신의 내게 뉴욕에서 일할 기회가 주어지다니, 뉴욕에 도착하고서도 믿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호주에서의 시작처럼 두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무척 설레었고, 내 진심이 이곳에서도 통하길 바라고 바랐다. 크리스마스 시즌과 새해를 눈앞에 둔 12월 23일, 나는 힐튼 계열의 한 호텔 룸에서 새해를 계획할 수 있었고, 행복과 설렘에 찬 관광객들과 비즈니스맨들의 친구이자 호스티스로서 호텔 조식 서비스를 책임지고 있었다. 


호주에서처럼 제일 먼저 출근했고 웃는 모습으로 먼저 인사를 하고 진심을 다해 하루하루 임했다. 진실한 마음이라는, 호주에서 갈고닦은 나의 차별성은 뉴욕에서도 효력을 발휘했다. 실습생 최초로 힐튼에서 서비스 인증서를 받았고 호텔 레스토랑의 매니저에게 “우리 모두가 너에게서 배울 점이 더 많았다.”는 극찬도 받았다. 

동료들의 따뜻한 롤링 페이퍼와 작은 선물, 사랑은 총지배인님을 지나 사장님께도 전해졌고 사장님과 함께 식사를 하는 영광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호주 때처럼 미국에서의 삶을 제안받게 되었다. 마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나오는 주인공 앤디처럼 한 편의 영화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내 앞에 펼쳐진 모든 것들이 눈뜨면 사라질 꿈처럼 너무 벅찼다.

 

미국에서의 삶? 미국 워킹 비자 제안을 받으며


이번에도 나는 내 생에 다신 올 수 없을지 모르는 기회를 거절했다. 

하지만 호주에서처럼 결심에 대한 결정이 어렵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확고한 내 비전을 다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 차별성을 확인할 수 있었고 관광 분야에 대한 학문적인 욕심과 새로운 서비스 분야에 대한 욕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나는 한국에서 남은 학기를 마무리하며 외국 항공사 취업과 동시에 관광경영 석사 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불과 3년 안에 내 모든 상황은 바뀌었고 내 생각과 마음은 더 자유롭게 비상하고 있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무척이나 감사하고 즐겁다. 꿈을 이뤄가는 이 순간들이 짜릿하리만큼 행복하다.


“I have always tried to find my limits, so far I did not find them. My universe is expanding.” 

나는 항상 내 한계를 찾으려고 노력하지만 지금까지는 그 한계를 찾을 수 없다. 나의 세계는 팽창한다.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의 말처럼 나는 한계를 생각하지 않고 나 자신의 성장을 위해 오늘도 도전하는 삶을 살고 있다. 

도전은 나를 살아 있게 하는 원동력이자 행복하게 해 주는 소중한 존재이다. 힘들었던 부분도 많았고, 아직은 성공한 사람들에 비하면 부족한 게 많지만 내 꿈을 설계할 수 있도록 도와줬던 호주에서의 삶과 그 설계에 대한 확신을 준 미국에서의 삶에 감사한다. 

그리고 인생의 주체로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었음에 또 한 번 감사한다. 

그리고 감히 말씀 드리고 싶다. 젊은 날의 도전이란 어쩌면 우리의 한계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긁지 않은 100% 복권이라는 것을. 적어도 내 경험으론 그렇다. 책상을 박차고, 크든 작든 인생의 값진 결과를 확신하며 도전하는 젊은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괜찮아, 청춘이야.


*출처: 월드잡 (www.worldjob.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