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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유명인들의 추천도서

정재승의 추천도서] 물리학자 정재승의 인생책, 그리고 서재 이야기

요즘 알쓸신잡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카이스트 정재승 교수님의 인생책과 서재이야기입니다.

몇년 전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서 인터뷰 하신 것이 있어 소개드려요.


사실 지금 이 공간은 서재라고 하기는 좀 누추하고요, 주중에 살고 있는 오피스텔인데 제가 가장 많은 시간들을 보내고 또 굉장히 아끼는 공간입니다. 사실 2년 전만해도, 책의 양이 너무 많아서 가지고, 책들이 제 방에 무덤처럼 쌓여있었어요. 원하는 책을 찾으려면 무덤을 헤집는 사람 형상이 될 수 밖에 없었죠. 이래가지고는 책 읽는 즐거움을 맛볼 수 없겠다 하여 이렇게 나름의 서재처럼 책장을 짰고요, 그 다음에 책들을 분류를 했어요.

책이 한 2만권 되어서, 처음에는 학생들의 도움도 받았지만 과학이랑 친하지 않은 학생들이라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가 식물에 분류되어 있고, 웹 진화론이 진화론에 꽂혀있기도 하더라고요. 결국 내 책은 내가 직접 정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몇 달을 정리한 책이에요. 

얼핏 보기에는 쭉 쌓여져 있는 것 같지만 나름 자연과학, 문학 소설, 인문 사회과학책들로 분류가 되어있고, 키워드 중심으로 제가 아끼거나 읽어야 하는 책들은 앞쪽에, 읽었던 책들은 뒤에 놔두는 방식으로, 나름 제 사고를 정리하듯 정리한 책장입니다.



사실 저한테 서재는 일종의 일요일 나른한 오후의 공동묘지 같은 거에요. 여기서 말하는 공동묘지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 나오는 무시무시한 공동묘지가 아니라, 언젠가 유럽에서 본 공동묘지 같은 거에요. 유럽에는 공동묘지가 마을에 하나씩 있더라고요. 그리고 가족들이 와서 일주일에 한 번씩 꽃도 갈아주고 가꾸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죽은 이들을 이런 식으로 기리는구나'라는 문화적 충격을 받았었는데, 제가 요즘 책을 대하는 방식이 이와 같은 듯해요. 

사실 책 한 권 한 권은 몇 백 년 전에 죽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쳐서 쓴 것들이죠. 저는 그것을 마치 그것을 굉장히 아끼는 사람의 무덤처럼, 잘 가꾸고 꽃도 놔주고 촛불도 켜고 때로는 잔디도 다듬고......그렇게 서재를, 공동묘지를 관리하는 관리자 마음으로 무덤 하나하나를 챙기면서 옛날 사람들의 삶을 뒤적여본다고 할까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던 것은 아닙니다. 뛰어 노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해가 질 때까지 골목에서 야구를 하고 장난을 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어요. 

책의 맛을 느꼈던 것은 고등학교 시절인 것 같아요.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기숙사 생활을 하는 곳이었고, 학생들이 다 수학이나 과학문제를 푸는데 많은 시간들을 보냈어요. 사실 저도 고등학교를 가기 전에는 그랬었는데, 막상 모두가 그러니까 숨이 막히더라고요. 그래서 고등학교 때 학교 도서관을 지키면서 책 정리를 맡으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일부러 과학책 말고, 문학이나 철학 책을 읽었죠. 내용을 다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읽고 있는 내가 좀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말했듯, 책을 이해해서가 아니라, '시험, 대학, 성공 외에도 나는 사람으로 태어나 추구해야 하는 문제들을 놓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대학에 들어가서는 세 가지 결심을 했는데, 그 중 하나가 내가 앞으로 평생 추구할 질문을 이 도서관에서 찾아보는 것이었어요. 방학 때는 도서관에서 열심히 살고, 읽어야 될 책 리스트를 만들고 하나씩 지워가고……대학원에 와서 본격적으로 책을 열심히 읽기 시작했고 그렇게 한 20대 중반, 책이 주는 즐거움에 빠지기 시작했던 것 같고요. 역시 뭐든지 늦게 배운 사람들이 오래 끝까지 하는 것 같아요. 그로부터 한 10년이 좀 넘었는데, 지금까지도 책을 누구보다 굉장히 소유하고 싶어하고, 소유한 책들에 대해서는 완전히 알고싶어 하잖아요.


과학은 본질적으로 쉽거나 재미있는 분야는 아니에요. 그러나 힘들게 추상적인 개념이나 수식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그 노력을 배반하지 않고 경이로움을 느끼게 해준다는 점에서 과학은 도전해 볼만한 분야인 것이죠. 그리고 이런 경험을 하고 나면, 나 혼자만 알고 있기가 너무 아까워요. 그래서 과학에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도 자연, 우주란 이런 것이라고 말하고, 공유하고 싶어지는 것이거든요. 저는 이게 과학자의 의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것을 아주 잘 한 과학자들이 있습니다. 

칼 세이건이나 리처드 파인만 같은 물리학자, 또는 리처드 도킨스같은 생물학자들의 책들이 오랫동안 읽히는 이유는, 자신의 분야의 최선전에 서서, '우리가 여기까지 왔고 지금 남아있는 문제들이 이런거구나.' 라는 것을, 최전선에 선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언어로, 뒤돌아서 사람들과 나누려고 했기 때문에 굉장히 감동적이기 때문이에요. 그런 점에서 저는 과학자들이 자신의 생을 바쳐서 쓴 책들은 어떤 분야든 간에 읽어보기를 먼저 권해드려요. 

그 다음에는, 과학하고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내 삶의 부분들을 과학의 눈으로 바라보며 새로운 통찰력을 전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의 글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죠. 예를 들면, 메리 로취라는 과학저술가가 있는데, 최근에 시체에 관해서 낱낱이 밝힌 과학책을 썼어요. 그런데 너무 유쾌하게 써서 읽고나면 과연 이게 우리가 그토록 무시무시하게 생각하는 시체에 관한 글인지 의아할 정도로 아주 즐겁게 읽을 수 있고요. 그러면서도 마지막에는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생명이 깃들어져 있는 몸과 그렇지 않은 몸은 무엇이 다른가 고민해보게 만들어주거든요. 죽음에 관해서 철학 책을 읽을 수도 있지만 또 이런 시체에 관한 책이 우리에게 죽음을 반추해보도록 할 수도 있는 것이죠. 말콤 글래드웰이나 톰 밴더빌트 같은 저술가들, 조나 레러 같은 뇌에 관해서 아주 통찰력이 있는 글을 쓰는 사람들, 이런 류의 사람들이 쓰는 글들이 훌륭한 이유는 각 분야에서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어서만이 아니라, 익숙한 것들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을 우리도 갖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게 그들의 글이 주는 장점이고, 저도 그런 글을 쓰고 싶고, 또 그런 책을 많은 분들이 읽고 즐겼으면 좋겠습니다.


물리학자 정재승이 추천하는 인생책

1. 수학사/ HOWARD EVES, 이우영 역/ 경문사

2. 카오스/ 제임스 글릭, 박배식 역/ 누림

3. 빈 서판/ 스티븐 핑커, 김한영 역/ 사이언스북스

4. 트래픽/ 톰 밴더빌트, 김민주/ 김영사

5. ICON 스티브 잡스/ 윌리엄 사이먼, 제프리 영/ 민음사

6. 강의/ 신영복/ 돌베개

7. 개성의 탄생/ 주디스 리치 해리스/ 동녘 사이언스

8. 거의 모든 것의 역사/ 빌 브라이슨/ 까치글방

9. 괴짜 경제학/ 스티븐 레빗, 스티븐 더브너/ 웅진지식하우스

10. 기억을 찾아서/ 에릭 캔들/ 랜덤하우스코리아

11. 나는고백한다, 현대의학을/ 아툴 가완디/ 동녘사이언스

12. 나쁜 사마리아인들/ 장하준/ 부키

13. 남쪽으로 튀어/ 오쿠다 히데오/ 은행나무

14. 내 딸들을 위한 여성사/ 정기문/ 푸른역사


*출처: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